[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보편적 사회복지, 노동에 길을 물어라

보편적 사회복지, 노동에 길을 물어라
[Corée]
newsdaybox_top.gif [26호] 2010년 11월 05일 (금) 18:56:16 제갈현숙/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 btn_sendmail.gif info@ilemonde.com newsdaybox_dn.gif

 지난 10월 프랑스의 노동자, 시민 그리고 고등학생까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거대한 파업에 나섰다. 누군가는 이를 계급투쟁으로 명명했고, 어떤 이는 연금 개혁을 둘러싼 전형적인 갈등으로만 이해했다.

한국인에게 프랑스의 이번 파업은 다소 낯설거나 염려스럽게 비쳤을 것이다. 연금 때문에 교통을 멈추게 하고 정유 공급에 차질을 빚게 하는 노동자는, 이제까지 한국적 맥락에서 시민의 불편을 볼모로 자신들의 이해만 주장하는 무도한 세력으로 여겨졌고, 더욱이 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고등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파업의 전면에 동참한다는 것은 기성세대의 걱정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모습이 낯설기만 한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복지제도로 생활이 좌우될 수 있는 국민은 전체의 3% 수준인 공공부조 대상자에게 국한됐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문제의 절박성을 해결하기 위해 여전히 ‘분신’이란 방법으로 노동자를 몰아넣고 있으며, 미래 노동자가 될 고등학생에게 그 누구도 노동법이나 노조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는 데 있다. 한국 언론은 노동자와 시민을 분리해 마치 노동권과 시민권이 대립되는 것으로 이데올로기화했고, 유럽 사회의 복지를 둘러싼 사회적 대립을 국가재정의 문제나 세대 간 대립으로 묘사하는 데 급급해왔다.

그러나 이번 프랑스 사태는 우리에게 복지 개혁을 둘러싼 문제의 본질이 재정 적자나 세대 갈등에 있다기보다는 자본이 책임을 회피한 결과임을 보여준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복지 개혁의 한계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낯설지만 교훈적인 프랑스 시위

연금개혁안의 핵심 내용은 현행 60살인 최저 정년을 62살로 연장하고, 이에 따라 완전노령연금의 수령 연령을 65살에서 67살로 늦추는 것이다. 프랑스 노령연금의 완전가입기간은 40년인데 개혁안을 적용한다면 가입기간은 41년 3개월로 연장되고, 연금 수령액은 20%가량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다. 10월 말 상원 의결을 거쳐 상정된 연금 개혁 법안이 하원에서 가결되면서 대통령의 서명만 남겨두고 있다. 정부는 연금 재정 적자를 노동자와 시민 개개인이 처리해야 할 부담으로 전가하면서 후세대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라는 논리를 펼쳐왔다.

그러나 프랑스 고등학생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청소년부 장관인 도브레스는 파업에 참가하는 고등학생을 제지하기 위해 개혁 법안이 젊은이를 위한 조치라고 항변했지만 동의를 끌어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25살 미만 프랑스 청년 4명 중 1명이 실업자라는 점에 있다. 이 법안이 실행된다면 청년 일자리 150만 개가 감소해 청년 실업률은 현재보다 더 높은 26%를 상회할 것으로 추산됐다. 비정규직이나 나쁜 일자리를 전전하는 청년층에게 결코 이 개혁안이 그들을 위한 조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국가는 그동안 재정 적자를 해소한다며 연금 수혜의 범위와 수준을 조정했고, 더불어 고용을 창출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본의 보험료 기여 부담을 축소해왔다. 그럼에도 고용은 증대되지 않았고, 재정 적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노후 생계와 청년 일자리가 불안해졌고, 사회보험 원리를 근간으로 하는 소득보장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조명이 시급해졌다.

   
▲ <무제>-2009, 이강혁

포디즘 생산관계가 포스트포디즘을 거쳐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전환됐지만, 노동과 복지의 관계는 여전히 포디즘적 요소가 있다. 즉, 완전고용과 정규직 노동자 중심으로 구조화된 소득보장 구조는 변화된 생산관계와 사회 패러다임에서 효력을 발휘하기보다는 많은 문제점을 야기했다. 20세기 말부터 유럽 사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사회 재생산의 문제를 구조화하기보다는 복지국가의 비용, 경제성장과 실업 문제만을 앞세워 사회적 책임으로 조직된 사회적 급여와 사회 서비스를 노동과 시민 개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해왔다. 고용 증대를 위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자본의 책임 축소, 노동시장 유연화 강화 등으로 노동자와 시민의 시장소득은 줄어들고 일자리는 불안정하게 되었으며, 서비스의 선별 원칙 강화로 시장소득 이외의 사회적 소득은 축소됐다.

생산관계 무시한 복지 재편의 실패

이처럼 상대적으로 보편적 복지 원리가 강하던 유럽에서조차 기존 사회복지의 보편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중요한 원인은 바로 생산관계와 무관하게 복지국가를 재편했다는 점이다. 즉, 자본에 대한 양보를 전제로 재정 중심의 복지국가 논의는 복지의 보편성을 축소시키면서 국가의 사회적 기능을 저하시켰다. 같은 시기에 국가는 시장을 강화하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 6월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공약을 계기로 이슈화된 보편적 복지 담론은 한국 사회 복지 담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보수주의 일각에서는 보편적 복지에 대해 개인의 책임과 독립심을 갉아먹고 국가에 대한 의존성을 강화해 국민을 ‘복지병’에 이르게 하는 위험한 담론으로 비판했다(이와 관련된 내용은 민경국 강원대 교수의 각종 칼럼을 참고하라). 그러나 지방선거에서 보편적 복지 담론을 내세운 후보자들이 당선되면서 부르주아 정치권 내부에서도 보편적 복지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에 이른다. MB 정부는 ‘친서민’을 내세워 복지사업 구상을 연일 발표했고, 한나라당은 민주당이 당헌까지 개정하면서 제시하는 보편적 복지에 대항해 ‘70% 복지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보수 및 자유주의 진영의 이런 변화는 차기 대선과 총선을 겨냥하고 계획된 정치 전략이면서 동시에 복지 담론의 장에서 그들이 이제까지 지켜온 가치를 양보하지 않기 위해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의 입장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보편적 복지에 전면적으로 반대하면서 국가의 역할은 잔여적 복지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이 경우 개인의 책임을 가장 중요한 가치 기준으로 삼지만, 책임을 다하고 열심히 살아도 생계 유지가 어려운 노동빈곤층이나 나쁜 일자리 노동자의 저임금과 무복지에는 원인도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

둘째, 정부는 친서민 정책을 위해 다양한 복지사업을 전개하며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보편적 복지에 접근하는 듯한 입장이다. 그러나 최근 김황식 국무총리의 복지에 대한 ‘무개념적’ 발언(“약자라고 무조건 봐주지 말아야 한다”, “응석받이 어린이에게 하듯이 복지도 무조건 줘서는 안 된다”, “복지도 결국 생산과 연결돼야 하는데 과잉 복지가 되다 보니 일 안 하고 술 마시고 알코올 중독되고 한다”)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과 지향은 없으면서 한시적인 제도 운용에 의한 국정 홍보용 복지사업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는 군사정권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복지를 구호로 활용했던 시기와 비교할 만하다.

보편적 복지, 한국의 이데올로기 투쟁

셋째, 한나라당의 70% 복지론은 민주당과의 차별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보편적 복지의 본질을 오도하는 담론이 되고 있다. 기초노령연금과 내년에 시행될 계획인 양육수당 등은 소득분위 70%에 해당하는 국민에게 지원한다. 이 기준선을 근거로 국민의 70%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복지를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지난 무상급식 논쟁에서도 경험했듯이, ‘복지를 어떻게 권리로 부여할 것인가’에 논의를 모으기보다는 ‘소득 상위 30%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로 쟁점을 이전시킨다. 이에 부잣집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을 하는 것이 과연 좋은 복지인가로 쟁점이 전환될 수 있고, 대중의 관심을 의도된 오류 지점으로 모을 수 있다. 이들은 ‘기본 권리는 무엇이고, 권리의 부여 방식은 어떠해야 하며, 이 땅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정치인이 해야 할 노력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회피한 채, ‘30 대 70 사회’의 정의는 70을 가려내서 그들에게만 제한적인 복지를 제공하면 된다는 식의 오류를 주도하고 있다.

사회복지는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문제와 노동문제의 피해자들이 생애 위험에 처할 때 그들에게 필요한 욕구(Need)를 어떻게 정당하게 충족해줄 것인가 하는 사회적 과제다. 20세기 초반까지 영국 구빈법(Poor Law)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자산 조사 없이 권리로서 생존 수준의 급여의 필요성을 제시한 윌리엄 베버리지에 의해 보편적 사회복지 원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확산됐다.

그러나 베버리지의 사회보험 원칙으로 달성할 수 있는 보편적 복지의 실현 가능성은 희박하다. 자산 조사를 시행하지 않고 가능한 사회복지제도는 사회보험제도고, 이 또한 정액 급여로는 적정 수준의 사회보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에게 필요한 욕구의 정도와 차이를 이런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이후 기여자와 비기여자의 차이는 확대됐고, 그 간극을 메워줄 만한 정책은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선별적 원리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회보험을 근간으로 한 보편적 사회복지 체계는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차별 없는 노동력 교환 전제돼야

최근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도 ‘역동적 복지국가’, ‘정의로운 복지국가’, ‘3차원 복지국가’ 등과 같이 보편적 복지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복지 담론이 논의되고 있다. 대부분의 담론은 소득보장제도의 핵심으로 사회보험제도를 시행함에도 다양한 원인으로 만들어진 사각지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서 출발한다. 또한 자산 및 소득 조사와 가족책임의 원칙(부양의무자 유무에 따른 수급권 부여)의 엄격성과 노동복지 연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 고민되고 있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가 재정 논리와 실질적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는 구호의 수준을 뛰어넘으려면 복지 영역뿐 아니라 노동 영역에도 주목해야 한다.

비정규직이 절반인 고용구조, 이 중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시장소득의 양극화와 다층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복지 영역에서 이들에 대한 보충적 급여는 매우 제한적인데다 선별 원칙이 활용될 수밖에 없다. 사적 소유가 정당한 사회에서 시장의 계약과 사적 소유를 지키기 위한 계급투쟁은 나날이 강화되는 반면, 노동권은 약화되고 탈계급사회의 권력 자원은 분산돼 있다. 노동시장, 즉 생산관계의 왜곡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기여자와 비기여자, 납세자와 수혜자 간의 대립은 복지를 권리로 향유할 수 없는 사회적 토대를 재생산시킬 것이다. 이에 주변화됐던 노동 영역에 복지 담론은 주목해야 한다. 이는 노동과 연계된 복지의 강화를 의미하지 않으며, 권리로서 복지가 수용되는 전제로서 모두의 노동력이 차별 없이 교환돼야 함을 의미하고, 이런 권리가 전제될 때 비로소 보편적 복지도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같은 권리를 부여하려면 분배적 차원 이전에 노동에서 차별과 소외를 최소화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글•제갈현숙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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